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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파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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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파출소 안내

소양 파출소 소개
  • 파출소 소재지 : 완주군 소양면 소양로 228(55316)
  • 전화번호 : 063) 219-1613
  • 관할구역 : 황운리, 대흥리 명덕리, 해월리, 신교리, 죽절리, 화심리, 신원리, 신촌리
  • 관광명소 : 송광사, 위봉사, 위봉폭포
동상치안센터
  • 전화번호 : 063)219-1643
소양면 주요기관
소양면 주요기관표
사무소 주 소 전화번호
소양주민자치센터 완주군 소양면 소양로 161번지 063) 290-3567
소양중학교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752 063) 243-8561
예비군면대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765 063) 243-8113
소양서초등학교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 1000 063) 243-8100
소양보건지소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50-56 063) 243-8035
소양초등학교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36-2 063) 243-8006
송광초등학교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774-5 063) 244-8111
소양농협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50-6 063) 243-8007
동양초등학교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534-2 063) 243-8106
소양신협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58-6 063) 243-6978
소양우체국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650 063) 243-8000
소양자율방범대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223 063) 243-3082
관광명소
  • 송광사

    송광사
    이 절을 처음 창간했다고 전해지는 도의선사의 속성(俗性)은 왕씨(王氏)이며 선덕여왕 5년(784)에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다가 현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가지산선파(迦知山禪派)를 열었다. 이 절을 처음 창간했다고 전해지는 도의선사의 속성(俗性)은 왕씨(王氏)이며 선덕여왕 5년(784)에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다가 현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가지산선파(迦知山禪派)를 열었다.
    현재 이 절의 이름을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 하는데 종남산이란 도의선사가 절터를 구하러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땅속에서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는 영천수를 발견하고 여기가 큰 절을 세울 곳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였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영천수를 받아들던 돌구유가 관음전 뒤편 담 밖의 논 귀퉁이에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전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이곳에 보존하고 있는 「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全州府松廣寺開倉之碑)」의 내용을 보면 송광사는 광해군 14년(1622)에 승려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보조국사의 뜻에 의하여 처음 세운 것이라고 되어 있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도승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한파인 조계종(曹溪宗)의 창시자이며 호를 목우자(牧牛者)라 했다. 그가 전주의 종남산(終南山)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이라 부른 우물을 발견하고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특이하여 그는 이 물로 인해 이곳이 앞으로 큰 절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샘 주위의 네 귀퉁이를 돌로 쌓아둔 뒤 순천(順天)으로 가서 송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제자들에게 전주 종남산을 지날 때 그 곳에 절터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과 거기에 반드시 절을 지으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보조국사가 죽은 뒤 오래도록 그의 뜻을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에 이르러서 전술한 응호 등의 승려들에 의하여 보조국사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힘을 다하여 마침내 이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한 지 14년이 걸린 인조 14년(1636)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倉祖)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송광사 절터의 땅은 앞에서 말한 승명(勝明)의 증조할아버지인 이극룡(李克龍)이 희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이 모두 완성된 뒤 벽암대사를 모시고 50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수천 명으로부터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보조국사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송광사 건물을 짓는 데 기술자만도 360여 명이나 필요하였다고 하며 건물을 짓기 위해 시주를 한 사람들도 수백 명이 된다고 하였다. 현재 송광사에는 개창비 등 4점의 지방유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 위봉사

    위봉사
    위봉사는 목각경판(木刻經板) 350여 매가 보관되어 있는데 경판들은『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지금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높이 3자 6치(약 110㎝), 둘레 7자 6치(약 240㎝)의 범종이 위봉사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암에는 현재 다섯 폭의 천불탱화(千佛幀畵)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고 뒷면에는 붉은 글씨의 범문(梵文)이 쓰여져 있다.
    이 위봉사는 604년 백제 무왕 5년에 서암대사(瑞巖大師)가 처음 세웠다고는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현재 위봉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극락전중수기(極樂殿中修記)」가 남아 있다. 이 중수기에 의하면 신라말에 한 서민 출신의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자가 전국 산천을 유람하다가 봉산(鳳山)의 남쪽에 이르러 산을 오를 때 한 풀섶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다가가 보니 그 곳에 세 마리의 봉황새가 공중에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한다. 이를 본 그는 그 곳에 절을 짓고 위봉사(威鳳寺)라 하였다 한다. 그 뒤 고려 공민왕 8년(1359) 당시 왕사(王師)였던 보제존자(普劑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 : 속성은 아(牙)씨, 속명은 혜근(惠勤)〕이 원나라에 다녀와서 전국을 다니며 포교활동을 할 때 이곳 폭포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머무르면서 전각 28칸을 짓고 암자를 10여 군데에 세웠다 한다. 세조 12년(1466)에는 최용각의 후손 최흥용(崔興勇)이라는 자가 진도(珍島)의 수령이 되어 부임을 하러 가던 중에 전주를 지나게 되었을 때 자기의 선조가 세웠다는 위봉사를 찾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이곳의 승려인 선석대사(善釋大師)와 석잠대사(釋岑大師)에게 부탁하여 선조인 최용각이 지었다는 건물들을 증수하게 하였다 한다. 숙종 원년(1675) 당시 전주부윤(全州府尹) 권대재(權大載)에 의해 위봉산성이 쌓여졌고 이어서 경기전의 태조 영정을 유사시에 안전하게 대피시켜 모시기 위한 행궁이 세워졌다. 또한 태조 영정을 모신 것을 봉축하기 위하여 산성 밖에 태조암(太祖菴)을 세웠다고 한다. 1868년에는 승려 포연(布蓮)이 60여 칸에 달하는 건물들을 다시 중수하였고, 1912년에 이르러서는 위봉사가 전국 사찰 30본사(本寺)의 하나로 지정 받아 52사의 말사(末寺)를 두게 되었다. 위봉사는 목각경판(木刻經板) 350여 매가 보관되어 있는데 경판들은『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지금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높이 3자 6치(약 110㎝), 둘레 7자 6치(약 240㎝)의 범종이 위봉사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암에는 현재 다섯 폭의 천불탱화(千佛幀畵)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고 뒷면에는 붉은 글씨의 범문(梵文)이 쓰여져 있다.
  • 위봉폭포

    위봉폭포
    산성 내의 모든 물이 한곳으로 모아 흘러 동상면 수만리 지향동(芝香洞) 서쪽으로 흐르는 바 폭 3m에 길이 60m를 두 굽이로 떨어진다(대아저수지에 흐름). 고종 31년 갑오(甲午) 서기 1894년 4월에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 위패(전주이씨 시조)를 이곳에 피난 이안하였다가 5월에 환안(還安)한 바 있었다. 위봉은 옛날부터 고산현에 예속되었었으나 축성 후 전주부에 이속되었고, 고종 32년 을미(乙未) 서기 1895년 폐성령(廢城令)으로서 모든 기능이 폐쇄.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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